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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길 (緋緞- Silk Road)

인생은 다 그런거야 2008. 7. 18. 13:50

비단길 (緋緞- Silk Road)

 

요약

중앙아시아를 횡단하는 고대의 동서교통로.

설명

중앙아시아를 횡단하는 고대의 동서교통로. 독일의 지리학자 F. 리히트호펜이 자이덴슈트라센(Seidenstrassen;絹街道)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 시초이며, 이 길을 통해 고대 중국의 특산인 비단이 서쪽으로 운반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중국 한(漢)나라 시대에 타림분지 연변의 오아시스 도시를 지나서 파미르고원을 넘어 중국과 서방을 연결하고 있던 길을 가리키는데, 동서교통로라는 뜻으로 확대 해석하여 서아시아에서 로마에 이르는 길과 스텝을 지나는 길(초원길), 해상교통로(바닷길)까지 이 안에 포함시키는 경향이 있다. 서남아시아에서는 이미 BC 6세기에 아케메네스왕조 페르시아가 동쪽은 서투르키스탄에서 서쪽은 소아시아반도에 이르는 영역을 지배하였고, BC 4세기 무렵에는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지중해 동부에서 인더스강까지 지배하는 등 일찍부터 정치적 통일과 함께 서남아시아세계라는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서남아시아 문화권과 중국 문화권을 처음으로 연결했던 길이 비단길이다.

비단길의 개통
중국과 서방의 교역로는 사서(史書)에 정식으로 기록되기 이전부터 통하고 있었다. 서방과 공식적으로 교통하기 시작한 것은 한나라 무제(武帝)의 명(命)으로 장건(張騫)이 중앙아시아에 파견된 뒤부터이다. 그의 여행을 계기로 <서역(西城)>이라는 중앙아시아나 서방 각지와 국교가 열리게 되었고 사절단(상인)이 중국을 방문하여 진귀한 물품과 문물을 가져오게 되었다. 장건이 비단길의 개통자가 된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한서(漢書)》의 <서역전>에는 당시 중국의 서쪽 관문이었던 옥문관(玉門關)·양관(陽關)을 기점으로 하여, 그곳에서부터 서쪽으로 향하는 두 갈래의 길이 적혀 있다. 첫번째 길(서역남도)은 로프노르 남안의 선선(미란)에서 부터 난산[南山(남산);쿤룬산맥] 북쪽을 서행(西行)하여 사처[莎車(사차);야르칸드]에 이르고 총령(蔥嶺;파미르고원)을 넘어 아프가니스탄 북부로 나오는 길이고, 다른 길(서역북도)은 차사(車師;투르판)에서 베이산[北山(북산);톈산산맥] 남쪽 기슭으로 나아가 소륵(疏勒;카슈가르)에서 파미르를 넘어 대완(大宛:페르가나)으로 통하는 코스였다. 서역남도에는 따로 야르칸드의 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파미르고원을 넘어 인도의 북쪽으로 나가는 길도 있었다.

당(唐)나라 시대의 비단길
당왕조(618∼907)는 건국 후 톈산산맥 서부 북쪽 기슭을 근거지로 한 서돌궐(西突厥)의 세력을 누르기 위해 적극적으로 서역 경영에 나섰다. 이 무렵 로프노르 일대의 건조화가 진행되어 서역남도의 이용도가 줄어들었고, 서역북도는 둔황[敦煌(돈황)]에서 북상하여 이오(伊吾;하미)로 나와 고창(高昌)에서 소륵으로 향하는 코스(톈산남로)와 톈산산맥 북쪽 기슭에서 나아가는 코스(톈산북로)가 이용되었다. 당나라의 정복활동은 북도를 따라 이루어졌다. 7세기 중엽 타림분지 전역을 제압한 당나라는 구자(龜玆;쿠차)에 설치한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를 중심으로 경영에 힘썼기 때문에 동서무역도 번창하게 되었다. 거기서는 소그디아나(서투르키스탄)를 본거지로 하는 소그드상인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탈라스강 전투(751)에서의 패전과 안사(安史)의 난(755∼763)으로 당의 세력이 쇠퇴해 가자 9세기 중엽 북아시아에서 이주하여 타림분지의 투르크화를 추진한 위구르인과 서쪽에서 진출해온 이슬람상인이 차츰 그들을 대신하여 갔다.

비단길의 역할
첫째 동서를 잇는 무역로로서의 역할을 들 수 있다. 중국에서는 특산인 비단이, 서쪽에서는 옥이나 보석, 유리제품 등이 이 길을 거쳐 운반되었다. 또 사자와 포도·석류·호두·완두·참깨·오이·거여목·잇꽃 등의 식물류, 비파·공후 등의 악기, 음악과 무용, 요술·곡예를 비롯하여 중앙아시아·서아시아의 산물과 풍속이 중국에 전해졌다. 또한 인도의 불교, 이란의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 네스토리우스파의 그리스도교(景敎), 이슬람교(회교)등의 종교도 전해졌다. 중국에서는 주철기술과 양잠, 제지법과 화법을 서방에 전했다. 비단길은 상업로로서뿐 아니라 동서문화의 전달로로서도 큰 의의를 갖고 있었다. 이와 같이 중국과 서남아시아 문화권을 연결했던 이 길은 몽골제국이 이 두 문화권을 포함하는 유라시아대륙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자 자연히 그 역사적 의의를 잃어갔다.

직물
비단길은 중국의 비단이 중앙아시아와 이란·메소포타미아의 오아시스 도시를 거쳐 로마에 운반된 대상로(隊商路)였다. 로마제국에서는 인도로부터의 해상로에 의해 산누에[野蠶(야잠)]비단을 사용하였으며 이에 반해 새로운 집누에[家蠶(가잠)] 비단을 진귀하게 여겼다고 한다. 비단은 BC 6세기 무렵 그리스에서 사용되었던 점과 알렉산드로스대왕의 동방원정은 페르시아인이 독점하고 있던 비단무역을 손에 넣기 위함이었다는 설로 보아 이 길이 옛날부터 열려 있었던 듯하다. 반대로 말하면 비단길은 서방의 여러 나라와 북방아시아의 유목민이 상용해 온 모피·전(氈;펠트)·융단 등 여러 모직물류가 중국으로 운반된 길이었다. 한나라 시대의 비단은 중앙아시아의 누란(樓蘭) 등과 시리아의 팔미라에서 출토되었으며 수(隋)나라와 당나라 초기의 대표적인 비단은 중앙아시아의 아스타나에서 출토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유럽 학자의 발굴에 의해, 또 제2차세계대전 후에는 중국의 연구가에 의해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졌다. 또 하나의 비단길은 중국 명(明)나라 때 생사·비단이 필리핀의 마닐라를 중계지로 하여 태평양을 횡단하여 아카풀코에 이르는 갈레온선(船)에 의해 신에스파냐(누에바에스파냐;지금의 멕시코)로 운반되었던 길이다. 이것은 멕시코에 비단을 유행시켰으며 각지에 양잠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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